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정찬주 지음/ 열린원/ 2011.03.20.
벌써 스님 가신지 한 해가 덧없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실로 허허했습니다. 스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니 무거움 마음입니다. 한편으로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 봅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 초반에 함께 이 땅에서 살았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는 분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축복이고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법정 스님의 재가 제자인 정찬주 작가는 법정 스님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 성지 순례하듯 글을 쓰고 있다. 스님과의 작은 인연과 말씀들을 적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스님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스님께서는 작가에게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주셨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작가가 나선 무소유 성지순례길 첫 번째는 송광사 불일암이다. 아침 햇살이 어른거리는 삼나무 숲, 삼나무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드러눕는 법이 없다. 스님이 주신 ‘알사탕’의 깊은 의미를 새긴다. 말없이 침묵 속에서 수양하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리라. 또한 스님께서 굴참나무로 만드신 ‘빠삐용 의자’는 ‘인생을 낭비한 죄’를 반성하며 이 의자에 앉아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본다. 수행자들은 삼부족(三不足)으로 정진해야 한다. 식부족(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이 그것이다. 공부하려면 먹는 것이 적어야 하고, 옷이 적어야 하고, 잠이 적어야 한다. 그것은 ‘간소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장소는 해남 우수영이다. 우수영은 법정스님의 고향땅이다. 진도가 보이는 바닷가 포구이다. 스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유는 폐 질환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계를 어렵게 해결하고 있었다. 스님은 목포로 유학하여 공부했다. 그러나 살림이 기울어 고등학교 때는 인쇄소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스님의 삶에서 큰 충격을 준 사건은 6.25 전쟁이었다. 전쟁의 야만성을 겪은 후 박재철(스님의 속명)은 새로운 인생길을 꿈꾸며 대학 3학년을 보낸 후 출가를 결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 장소는 진도 쌍계사다. 쌍계사는 스님께서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하룻밤 묵고 온 인연이 있는 절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운해서 흐느껴 울었던 기억을 가진 곳이다. 네 번째 장소는 통영 미래사다. 미래사 효봉암은 행자 법정이 효봉 스님을 모시고 수행자로서 첫발을 내딛었던 곳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더부룩한 포만감을 경계하여 공양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외운다. 그래서 부엌의 탁자 옆에 ‘먹이는 간단명료하게’라고 써놓고 반찬은 세 가지 이하로 줄였다. 먹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위해 이 공양을 받습니다.
다섯 번째는 하동 쌍계사다. 효봉 스님 아래서 행자 생활을 할 때 구례장터에서 서점에 들렀다가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를 한 권 사서 탑전으로 돌아와 밤 9시 넘은 취침 시간에 고방으로 들어가 호롱불 밑에서 읽다가 큰 스님에게 들켰다. ‘세속에 미련을 두고 그런 것을 보면 출가가 안 되느니라. 당장 태워버려라.’ 법정은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태워버렸다. 효봉 스님과의 일화로 화개장터에 장보러 갔다가 점심 공양을 넘긴 적이 있었다. 효봉 스님은 크게 실망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점심 공양은 짓지 마라.
오늘은 단식이다.
나도 굶고 니도 굶자.
공부하는 풋중이 시간을 지킬 줄 몰라서야 되겠느냐!”
여섯 번째는 가야산 해인사다. 스님은 20대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강원 학인이 되었다. 장경각을 내려오는데 한 아주머니 보살이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때 스님이 무심코 저 위에 있는 것들이라고 말하자 보살이 ‘아, 그 빨래판 같은 것’ 하고 대꾸하였다. 그 순간 스님은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20대에 스님께서는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졌었다. 대구로 나가 양키 시장이나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았다. 클래식 음악에서부터 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스님의 글 솜씨가 신문사와 잡지사에 알려지면서 스님은 여러 글들을 기고했다. 스님의 글 중에서 ‘굴신운동(屈身運動)’이란 제목의 글이 절에서 반발이 컸다. 성철 방장 스님의 ‘불전삼천배’를 모독했다고 성철스님을 따르는 스님들의 항의가 많았다. 그러나 훗날 성철스님은 법정에게 “펜대를 바로 세우고 글을 쓰는 사람은 법정뿐이다” 라고 인정하였다.
일곱 번째는 봉은사 다래헌이다. 스님이 다래헌에 머문 시기는 1969년 37세부터 1975년 43세 여름까지였다. 스님은 다래헌 시절에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반독재 운동을 하셨다. 또한 이때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셨다. 1971년도 <현대문학> 3월호에 [무소유]를 발표하여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스님은 동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덟 번째가 강원도 오두막 수류산방이다. 오대산 쯔데기골에서 홀로 수행을 했다. 자연을 벗 삼고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스님이 계신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스님은 자주 만나는 사람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기 세계를 일구며 스스로의 질서를 흩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더 신뢰했다. 자기만의 개성을 꽃피울 것과 누구도 닮지 않는 자주성을 강조하셨다.
법정 스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
마지막으로 길상사다. 길상화 보살의 기부로 만든 길상사 행지실에 스님께서는 한 번도 주무시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고기를 먹는 것은 짐승의 원망을 먹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짐승이 인간들의 혀를 위해 죽을 때 얼마나 원망을 품고 죽겠느냐는 말씀이다. 또한 스님께서는 침묵을 유난히 강조하셨다. 젊은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호두알만한 알사탕을 꺼내 주시며 토방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조계산 자락이나 쳐다보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알사탕을 주신 까닭은 남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말고 침묵의 체로 걸러낸 맑은 지혜를 체험하라는 경책이었을 것이다.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는 말은 사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읽고 젊은 시절 담담하고 청정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한지도 40여년이 지났다. 스님이 실천하신 무소유와 말과 행동의 일치, 종교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자신에 대한 엄격한 수행자의 길을 지켜보면서 같은 시대, 같은 나라 땅에서 태어나 함께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정찬주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법정스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법정 스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지금 이곳에 계신다고 믿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올곧게 살아가겠습니다. 법정 스님, 뵙고 싶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계시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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